한국문학관 협회 로고

스토리텔링 #4
조병화 시인의 그림 두 점, 봄날과 달밤

한국시조문학관(서울)에는 조병화 시인의 1987년에 그린 그림 두 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 그림은 백이운 시조시인이 본 문학관에 기증한 것이다. 시인이 이 그림을 22년이나 보관하였다고 하니, 어느새 애장품이 되어버린 이 그림을 시조문학관에 기증 하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많은이들이 감상하게 하겠다는 마음은 그만큼 그림을 아꼈기에 가능했으리라.

조병화 시인은 195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런 시인은 어디를 가든 항상 스케치북을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백지 위에 간간이 시를 쓰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본 문학관에서 소장하는 그림 중 한점은 봄날 한때의 사랑을 그려놓은 것 같이 아름답다. 한적한 시골길을 돌아들면 아스라이 멀리 고향 집이 보일 듯한 정경이다. 하늘은 맑고 길 양옆으로는 연분홍 들꽃들이 만발해 보는 이들의 마음을 마냥 설레게 한다. 시인은 볕 좋은 봄날, 베레모를 쓰고 장미나무 뿌리 파이프를 물고 이 길을 걸었을까. 연분홍 꽃길 한켠에 앉아 스케치하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림은 엽서의 두 배 정도 되는 크기라 방문객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하지만 평소 즉석에서 하이쿠를 지어 읊어주기도 했다는 조병화 시인만의 느낌이 묻어 나온다.

별명이 ‘멋생 멋사’였다는 고, 조병화 선생. 시인의 아들 조진형은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제가 어렸을 적에 기차를 타고 어디로 여행을 갈 때 아버님이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서울역을 스케치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불과 5분 사이에 서울역을 스케치북에 비교적 상세히 그리시는 것을 보고 대단한 재주를 가지셨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아버님은 해외여행을 하시면서도 많은 그림을 스케치하여 화집으로 내신 적도 있습니다. 유화를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한 것은 대학 학장을 맡으신 후입니다. (중략) 어렸을 때 화가가 되려던 꿈을 실현하신 것입니다. 취미 삼아 그린 것이 18회가 넘는 초대 전시회를 가지셨으니 웬만한 화가 못지않은 업적을 내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버님의 그림은 시로 표현하기 힘든 것을 표현한 것 같아 그림도 하나의 시로 느껴집니다. 아버님은 ‘그림은 나의 위안’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랬다! 조병화 시인의 그림은 시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가 가 닿을 수 없는 곳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그래서 마치 한편의 시를 보는 느낌이었고, 시인의 마음 한켠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이런 느낌은 본 문학관이 소장한 두 번째 그림도 마찬가지다. 보름달이 환히 뜬 밤, 포근한 어머니의 품과 같은 달빛이 내려 따스한 작은 집. 그 집의 창문 사이로 금방이라도 새어나올것만 같은 어머니의 미소. 어쩌면 시인은 어머니 품에서 충만했던 어느 한때를 그렸는지도 모르리라.

그런 아버님에 관해 아들 조진형은 “아버님의 ‘나의 생애’라는 시 중에는 “럭비는 나의 청춘, 시는 나의 철학, 그림은 나의 위안, 어머니는 나의 고향, 나의 종교”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아버님은 이 시를 늘 마음에 두시고 그렇게 살아오신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조병화 시인이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나의 종교” 이 두 번째 그림 ‘달밤의 사랑’에서는 그런 어머니를 햐한 사랑이 느껴진다. 

백이운 시인이 이 두 점의 그림을 선물 받은 것은 1987년이라고 한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 해는 조병화 시인이 1986년 정년퇴임을 하고 청와헌을 짓고, 자주 고향에 내려가 있던 다음 해라고 한다. “1987년 11월 나는 출판사를 차려 선생님의 시집을 첫 번째 책으로 펴냈습니다. 생각난 김에 찾아보니 그때 써주셨던 자필 서문과 시편마다 그려주셨던 펜화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컷들은 언젠가는 후배 시인들에게 한 장씩 나눠 줘야지 하고는 그대로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꼼꼼하고 까다로운 분이셨지만 늘 덕담을 잘 하시고 소년처럼 순수했다는 조병화 시인. 시인은 ‘럭비는 나의 청춘’이라고 할 만큼 럭비를 사랑했다고 한다. 국가대표까지 지내며 일본 원정을 하기도 했고, 럭비축구협회 창립 맴버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 시인은 작고하기 전,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시인 조병화보다는 럭비맨 조병화로 기억되고 싶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런 럭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가장 사랑한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이러한 사실은 시인이 청와헌 옆에 있는 자신의 묘비에 ‘꿈의 귀향’이란 단 3줄로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을 표현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조병화 시인은 어머니를 닮아 항상 부지런하고 검소했다. 늘 상의에 꽂고 다니는 포켓치프마저 쓰다 헤진 스카프였다고 한다. 또, 받으신 초대장들은 버리지 않고 전화번호를 적거나 간단한 메모용지를 사용하였고, 받으신 대봉투들은 잘 보관하여 재활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조병화 시인은 ‘어머니’에 관해 이렇게 적는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어머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중략)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어머니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뚝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 조병화, 어머니’ 전문

‘럭비선수였고 교수였고, 화가였고, 시인이었던 조병화.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어머니를 사랑했던 럭비선수. 조병화 시인의 어머니 사랑의 마음은 오늘도 한국시조문학관(서울)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 따스하게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