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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5
병아리와 수탉, 그리고 아버지라는 이름 - 민이식 화백의 그림에 이근배 시인 ‘시’

한국시조문학관(서울)에는 계정 민이식 화백의 문인화가 한점 있다. 누구보다 문인화를 현대화하는데 앞장섰던 선생의 그림을 감상하고 이근배 시인이 시를 썼다. 민이식 화백은 사군자에서부터 화조, 인물, 문인산수와 십장생도, 민화, 풍속화 등 우리 민족의 예술 양식을 깊고 넓게 천착해 온 화가이다. 수묵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묵화에서 채색화까지, 새로움을 추구하며 현대 문인화의 전형을 창조해 온 것이다 

 

본 문학관에 전시된 민이식 화백의 그림에는 봄날, 병아리 두 마리와 수탉이 보인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곳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수탉’이다. 문인화를 비롯한 일반적인 그림에서 알을 품고 병아리들을 돌보는 건 암탉이다. 그런데 특이하게 이 그림에서 병아리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건 수탉이다. 힘 있는 붓끝의 터치로 늘어진 잎을 큼지막하게 그려 놓고 그 아래 검정과 노랑 병아리 두 마리를 그려 놓았다. 아마도 아직 덜 핀 꽃봉오리가 있는 걸 보니 계절은 이른 봄날 같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무렵 암탉은 보이지 않고 수탉이 병아리를 향해 말을 건네고 있다. 이 모습에서 뭔가 평범하지 않는 새로움이 돋보인다. 민이식 화백의 그림을 보고 이근배 시인은 시로 이렇게 쓴다.

“햇살이/ 

곱게 눈을 뜨고/

삐약 삐약/ 

엄마를 부르고/ 

바람이 마당을 끌고/

아장 아장/ 

걸음마를 배운다/

엄마 닭이 잠시/ 

마실 간 사이/ 

오냐 오냐/ 

내가 놀아줄게/ 

까꿍 까꿍/ 

재롱을 떠는 / 

어느 봄날”

이근배 시인은 암탉이 아닌 수탉이 그려진 것을 본 것이다. 그래서 엄마 닭이 잠시 마실 간 것이라고 한다. “오냐 오냐/ 내가 놀아줄게/ 까꿍” 아빠가 재롱을 떠는 모습을 상상하며 시인은 잠시 행복했을까. 어쩌면 어릴 적 아버지를 생각하며 잠시 눈을 감기도 했을까. 이근배 시인의 창작한 시를 감상하고 이 작품을 다시 본다. 병아리들에게 바짝 부리와 발을 대고 서 있는 수탉의 모습도 바짝 긴장한 모습이다. 병아리들과 함께 놀아주고 싶은데, 금방이라도 울어버 까 겁을 먹은 모습에서 재미성이 느껴진다. 또, 검정 병아리는 몸을 옆으로 돌리고 수탉을 보는 모양새가 뭔가 풀이 죽은 모습이다. 검정 병아리는 놀아주겠다고 재롱을 피우는 노랑 병아리가 부러웠을까. 

이 시를 쓴 이근배 시인은 태어나서 10살 전까지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어머니는 공산주의를 했던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하며 살아야 했다. 시인은 1949년 열 살 무렵, 처음으로 아버지를 뵈었는데, 곧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이후 잠적한 아버지의 소식은 지금도 들은 적이 없다고 한다. 당진 군수를 지낸 할아버지와 달리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마을에서는 빨갱이라고 모두가 꺼리는 사람이었다.

가족을 단 한번 부양한 적이 없었던 아버지, 아버지의 사상으로 놀림을 받았던 어린 시절. 어쩌면 이근배 시인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어 문학을 하게 되었고, 그런 후에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전쟁이 나던 해 가을 집에서 머슴을 살던 사람도 사람들이 빨갱이 집에서 머슴을 산다는 놀림에 집을 나갔다고 하니, 어린시절 시인이 받았을 마음의 상처가 어떠했는지 조금은 짐작이 간다. 이러한 사실을 이근배 시인은 본 문학관에 전시된 ‘냉이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머니가 매던 김밭의

어머니가 흘린 땀이 자라서

꽃이 된 것아

너는 사상을 모른다

어머니가 사상가의 아내가 되어서

잠 못 드는 평생인 것을 모른다

초가집이 섰던 자리에는

내 유년에 날아오던

돌멩이만 남고

황막하구나

울음으로도 다 채우지 못하는

내가 자란 마을에 피어난

너 여리운 풀은

- 「냉이꽃」전문

냉이꽃처럼 살다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작품이다. 마을에서는 사상가의 집이라고 돌멩이를 던졌다. 잠시 가족들과 함께 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인공기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선 아버지. 무심한 가장이 있다 떠난 자리를 가득 채우는 다름아닌 무성한 풀이다. 그런 시인의 마음 한켠의 아버지는 “오냐 오냐/ 내가 놀아줄게/ 까꿍 까꿍/ 재롱을 떨기도 했을까. 열 살이 되어서야 본 아버지가 어색해서 가까이 오는 아버지를 두고 어머니를 찾곤 했을까.

이 그림에서 특이한 것은 검정 병아리이다. 노랑 병아리와 수탉의 즐거운 한때의 대화를 바라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근배 시인이 유년의 상처를 안고 자라며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할 수 있게 한 것은 어쩌면 문학일 것이다. 이렇게 화가와 시인은 마음 한 자리에서 만나 시가 탄생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한국시조문학관(서울)에서 그림과 시의 만남전을 개최하는 이유인 것이다.

이 작품이 창작된 것은 수원시화전 때문이다. 한국시조문학관에서는 융복합 문화예술을 위한 특색 있는 시화전을 자주 개최한다. 2016년에는 수원화성 방문의 해를 맞이하여 화가가 그린 그림을 보고 시인이 시로 창작하는 이채로운 행사를 개최하였다. 그 행사에는 900인의 미술가 및 시인의 그림과 시가 수원시미술전시관 1관부터 3관에 걸쳐 빼곡이 전시되었다 인문학 콘서트와 함께 진행된 이 시화전에는 전 도종환 시인이자 장관을 비롯, 신달자와 정병례, 유안진과 이부재, 정진규와 이근배, 고은, 오세영과 류영도, 안도현과 박종회, 최동호와 박성현, 윤수천과 원구식, 정일근과 김일해, 유재영과 임항택 등의 특강이 있었다. 이름 있는 시인과 화가가 짝을 이룬 특강이 전시회를 찾는 이들에게 유익한 시간을 선물했다.

시화전은 끝나도 유명화가의 그림을 보고 그린 ‘시’는 남아 있다. 어느 한때의 아름답거나 슬픈 기억들을 호명해 세상에 내놓고 함께 공감하고 감상하는 시간. 이러한 귀한 시간들은 한국시조문학관이 선물한 소중한 어느 한때이다. 가족을 포기하고 사상을 선택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둔 가족들을 꺼렸을 세상, 군수를 지냈지만 아들을 북으로 보낸 할아버지. 이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이근배 시인은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학이 있어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있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