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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9
《문장》지와 『이호우 시조집』에 대하여

《문장》지는 1939년 2월 이병기, 정지용, 이태준, 김용준, 길진섭 등에 의해 창간되었다가 1941년 4월에 폐간되었다. 3년도 채 발간되지 못한 이 잡지가 한국문예사에주는 의미는 매우 크다. 이 잡지는 전통을 지향하면서도 추천제를 통해 당대의 훌륭한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소설에 자하련 외 9명, 시에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외 10명. 시조에 조남령, 김영기, 김상옥, 이호우, 장응두, 오신혜 등 6명이다.

《문장》지는 또 문학과 미술을 접합시킨 점에서도 그 의미가 있다. 편집주간은 소설가 이태준이었고, 장정은 길진섭, 삽화와 컷은 김용준이 담당하였다. 이 잡지의 2호 편집후기에는 창간호가 발매된 지 5일 만에 절판되었다고 한다. -.  (《문장》1권 2호, 1939. 03.)

그렇다면 《문장》지가 추구했던 예술관은 어떠했을까. 창간호의 권두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좁게 서재에만 스스로 갇혀 신변잡사류에나 과민한 것이 문필인이라면 이는 문필, 그 자체를 위해보다 먼저 그 인간으로서, 국민으로서, 시대인으로서 망각했음이 크다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중략) 

우리 문필인의 시험관은 연구실 속에 있지 아니하다. 

우리가 발견하고, 지적하고, 선양할 바 대상은 민중 속에 있고, 전 국가적인 사태에 있고, 시대라거나 세기란 방대한 국면에 있는 것이다. 

(중략) 

모름지기 필봉(筆鋒)을 무기 삼아 시국에 동원하는 열의가 없어선 안 될 것이다.” 

《문장》지는 이처럼 문필인이라면 서재에만 갇혀있지 말고 민중 속에서 시대를 살아야 함을 강조한다. 

당시, 이태준이 쓴 『문장강화』를 보면,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고 문자로 그려내는 것이 여기서 말하려는 묘사라고 하면서, 어떤 글에고 정말 같아서 읽는 사람의 눈에 그 인물, 그 정경이 그대로 보이는 듯하지 않으면 그 글은 실패라고 한다. 또, 정지용은 “시가 솔선하야 울어버리면 독자는 서서히 눈물을 저작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고 하면서, 시인이 자신의 감정을 다 노출할 것이 아니라 독자가 그 시에 참여해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시인은 “오직 생명에서 튀어나오는 항시 최초의 발성이어야만 진부하지 않”으며, “안으로 열”하다고 하더라도 시인은 겉은 서늘하게 표현해야 함을 강조한다. 시작이란 성정의 참담한 연금술이요, 생명의 치열한 조각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지용 시인의 휘문고보 스승이었던 가람 이병기 시인 또한 이미지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병기 시인은 ‘시조는 혁신하자’에서 실감실정, 취재 범위의 확장, 용어의 변화, 격조의 변화, 연작 쓰기, 쓰는 법과 읽는 법에 대해 강조하였다. 이병기 시인은 1891년 전북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에서 출생하였다. 고향의 서당에서 8세에서 18세까지 한문을 공부하였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고, 40대 이후에는 전국을 순회하며 한글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이호우 시인은 바로 이런 《문장》지로 등단한 시조시인이다(1912~1970). 이호우 시인은 가람 이병기 시인이 『문장』지에 「달밤」을 추천하면서 등단하였다. 시인은 경성제일고보와 일본 동경예술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36년 「영춘송」이라는 시조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입선하였고, 1940년 추천을 완료하기 전까지 동아일보 독자 투고란에 여러 시편을 투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가람 이병기 시인에 의해 『문장』 1940년 추천되어 정식으로 등단하게 된 것이다. 

낙동강洛東江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 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익은 풍경이되 달 아래 고쳐보니

돌아올 기약 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 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정화淨化된 초가집들

할머니 조웅전에 잠들던 그날 밤도

할버진 율律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니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뛰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이호우, 「달밤」 전문

 이 작품은 이호우 시인의 첫 시조집 『이호우시조집』(영웅출판사, 1955. 6. 20)에 실린 작품이다. 위 작품을 보면 이호우 시인의 작품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군수를 지내면서 소실을 거느리고 타지를 떠돌았기 때문이다. 이호우와 이영도 남매는 그런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머니를 보며 마음 아프게 자랐다. 그런데 이후, 이호우 시인은 「바람벌」이라는 작품으로 구속되어 생사의 갈림길에 서기도 하고, 연이은 필화사건을 겪기도 한다.

그 눈물 고인 눈으로 순아 보질 말라/ 

미움이 사랑을 앞선 이 각박한 거리에서/ 

꽃같이 살아 보자고 아아 살아 보자고// 

욕이 조상에 이르러도 깨달을 줄 모르는 무리/ 

차라리 남이었다면, 피를 이은 이 겨레여/ 

오히려 돌아앉지 않은 강산이 눈물겹다// 

벗아 너마저 미치고 외로 선 바람벌에/ 

찢어진 꿈의 기폭인 양 날리는 옷자락/ 

더불어 미처보지 못함이 내 도리어 섧구나// 

단 하나인 목숨과 목숨 바쳤음도 남았음도/ 

오직 조국의 밝음을 기약함에 아니던가/ 

일찍이 믿음 아래 가신 이는 복되기도 했어라 -이호우, 「바람벌」 전문

 이호우 시인은 1955년 대구대학보에 실린 이 작품으로 인해 구속되었다. 반공법에 저촉된 것이 이유였다. 이 시대에는 무엇보다 이념이 중시되었기에 반공이 강조되던 시기였음은 이 시조집 뒤 판권지 위에 쓰인 짤막한 ‘우리의 맹세’에서도 확인된다. 당시의 필화사건에 관해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경향신문 2016년 10월 26일 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집 전화번호가 815에다 전용차에 금고도 갖췄던 윤택한 이 시인은 1949년 남로당 도당 간부라는 모략에 걸려 군사재판에 회부되면서 모든 재산이 파탄난 뒤 1950년 봄 시인 김광섭의 노력으로 석방됐으나 육신은 폐인이었다.

 ‘죽순(竹筍)’ 동인들 집합소였던 시인 이윤수(李潤守, 1914~1997)의 시계점(名金堂)에서 알게 된 한 여인이 화근이었다. 그녀를 좋아하던 헌병 대위가 모함, 남로계로 몰아 여순사건의 16연대 반란에 연계시켰으니 한국판 <25시>였다. 나중 대구시내에서 빨치산에게 노획한 물품전시회가 열렸는데, 맨 앞에 이호우 시인의 금고가 있었다 (시인의 차남 李相麟, 80세, 증언. 2016년 10월 26일자, 경향신문).

민병도 시인은 초기 이호우 시조미학은 모든 목숨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과 자연에 대한 연민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양상은 이호우 시인의 첫 시집인 『이호우시조집』에 잘 나타나 있다. 군수였던 아버지와의 갈등→형의 죽음→1929년 동경예술대학에 유학을 갔다 병으로 학업 포기와 귀국 → 1949년 정치적인 문제 등으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 간신히 석방(함께 연루된 8명중 4명은 처형) → 1960년 반민주행위자 조사 위원회 회원으로 활동 좌절. 일생에 거친 거듭된 꿈과 좌절을 경험하며 시인은 시조를 창작한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 속에서 창작된 작품이기에 『이호우시조집』 에는 그 어떤 시조집보다 생명에 대한 간절함과 설움이 잘 나타나 있다. 

차라리 절망을 배워

바위 앞에 섰습니다

무수한 주름살 위에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바위도 세월이 아픈가

또 하나 금이 갑니다 -이호우, 「금」 전문

 이 작품에서 시인은 어쩌면 자신은 차라리 절망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한 생을 살았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세월의 주름살 위로 햇살보다는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한없이 아프기만 한 세월의 흔적을 첫 시조집에 남겨 놓고 이호우 시인은 세상을 떠났다. 그런 시인은 시조를 ‘민족의 문화예술’로 상승시키고 음악성을 중시한다면, 범국민적 국민 시가로서의 존재성과 효능성이 높다고 주장하였다. 시인은 무엇보다 자유시가 놓친 것들 율격, 즉 다양하게 변용된 율격, 시상의 견고한 안정성, 우리 것에 대한 발견 등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꿈과 좌절, 설움과 절망 가득한 생을 그려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