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툰드라의 문자성을 찾아서
글쓴이 : 한국문인인장박물관 날짜 : 05.11.22 조회 : 4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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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툰드라의 문자성(文字城)을 찾아서



이  호(문인인장박물관)




1. 기억과 망각사이: 서울에서 쌍페테부르그까지




  한국문학관협회 2005년도 사업계획에 따라 각 문학관에서 참가한 우리 일행은 4박 6일간의 러시아 문학관 견학에 나서게 되었다. 러시아1)는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를 비롯해 세계적인 명작을 남긴 거장들을 대거 배출한 문화와 예술의 나라였기 때문에 그들의 자취를 보존한 문학관을 견학한다 것은 가슴 설레이는 일이었다.


  러시아! 한때 노서아(露西亞)라고 불리웠으며, 구한말과 한국현대사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나라. 일제강점기 한국의 좌파 지식인들에겐 식민지 모순과 계급 모순을 동시에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 여겨진 정신적 지주의 나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성취하지 못한 탓에 노정(路程)된 것이기는 했지만, 한반도 분단에 절반의 공로를 세운 나라. KGB와 <닥터 지바고>로 알고 있는 이름이 이제는 사라포바(M. Sharapova)와 푸틴(V. Putin)으로 익숙해졌다.


  해방 이후 소련으로 불리웠으나 소련연방의 해체와 함께 러시아라는 이름으로 다시 다가온 나라. 그래서일까? 러시아라는 이름은 구원(舊怨)의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예술의 향취 가득한(발레, 문학 등) 나라로 떠오르는 것은 우리의 기억력이 형편없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KAL기 격추사건2)으로도 기억하고 있는 그 이름을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우리의 기억력 때문이 아니라 과거의 원한만으로 세상을 살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역사가 남겨준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힘이 없다면 언제든 약소국의 설움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냉엄한 국제질서의 논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작용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고 보면 힘의 논리에 의해 추동되는 세계사의 흐름에 바뀐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언제 다시 경색될지 모를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러시아는 다만 현재 우리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으며 왕래가 가능한 나라, 우리와 무역거래를 하는 나라일 뿐이었다. 힘 있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사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힘이 없으면 생존하기 어렵다는 냉엄한 국제질서의 논리가 자꾸 상기되는 것은 러시아라는 이름이 아직은 생소하고 편치만은 않은 때문인 듯 했다. 나는 60년이라고 하는 반세기 동안의 사건을 완전히 잊지도 못한 채 러시아라는 이름이 가져다주는 향취에 기대를 가진 어정쩡한 상태로 러시아 항공기 아에로 플롯(AERO FLOT) 600기에 올랐다.







  우리가 탄 러시아항공기는 중국의 파미르 고원과 몽고의 초원, 우랄산맥을 넘어 모스크바의 모스크바의 쉐레메체보(SheremetyevoⅡ)공항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입국심사대를 한참만에 통과한 우리들을 처음으로 맞아 준 것은 코카서스인들처럼 코가 높고 굴속처럼 깊고 푸른 눈동자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낯선 사람들이었다.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에서 본 배우들을 닮은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그 지방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곁을 지날 때마다 ‘노린내’가 훅 풍겨왔다. 그것은 타자들의 냄새였다. 그들 역시 우리에게서 마늘 냄새 혹은 김치냄새를 맡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좁고 협소하며 다소 누추해 보이기까지 한 공항에 비해 한국의 가을날씨를 연상케 하는 대기가 피부에 선득선득했고 백야로 인해 아직도 강렬한 초저녁의 태양은 찬란하게 눈부셨다. 공항 밖에는 차들이 낚은 탓인지, 휘발유 정제기술이 낙후된 탓인지 자동차의 배기가스로 골치가 아팠다. 국내선으로 갈아타는 공항의 무질서는 낙후된 러시아를 여실히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공중도덕을 나무라기 이전에 시스템의 부재였다. 그러나 시스템이란 얼마나 많은 것을 의미하는가? 시스템이란 물적 토대(경제력)이면서 제도의 효율성이며 동시에 의식의 선진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결국 그 나라의 척도요 알파와 오메가다. 


  강대국이지만 후진국인 러시아. 후진국일수록 생활세계(Lenbenswelt)에서 공권력은 사실상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러시아의 경찰과 공권력이 그렇게 무지막지 함에도 사소한 곳에서 벌어지는 위반들은 너무도 전방위적으로 자주 이루어지기 때문에 통제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그런 것은 강제로 이루어질 수 없는 부분들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어쩌면 강한 억압의 대가로 사소한 것은 허용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흡연금지구역 표시는 오히려 흡연이 가능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지시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러시안들은 영어를 잘 하지 못했다. 그것은 교육과 문화, 자본에 뒤떨어져 있다는 얘기였고 그것 역시 시스템의 부재를 지시하는 증좌였다. 질서와 청결은 실종되었고 무질서와 불친절은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었다. 그것은 인도나 터키에서 느낄 수 있는 무질서와는 다른 종류의 무질서였다. 전자의 나라들에서 보는 무질서는 그 무질서 속에 그 나름의 질서와 문화가 있어 간만에 무질서를 맛보는 것이 즐거운 경우라면, 러시아의 무질서는 통제 속에서 사소한 것은 허락해준다는 보상으로서의 무질서 같은 느낌이 들어 뭔가 께름칙했다.


  줄을 서고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 별 커다란 의미가 없는 좁은 국내선 공항의 검색대를 통과해 시내버스만도 못한 국내선 비행기에 가장 늦게 올랐다. 1시간 남짓한 비행 끝에 우리는 유럽으로 통하는 관문인 쌍 페테부르그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시간은 이미 밤 10시가 넘어 있었다. 공항 앞뜰의 공기는 차가웠고 입에서는 허연 입김이 나왔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며 북방의 파리 혹은 북유럽의 베니스(과연 베니스처럼 운하가 많았다)라는 별칭을 가진 쌍페테부르그의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레닌의 동상을 볼 수 있었다. 소련의 해체 이후 러시아에서 레닌동상은 모두 철거된 것처럼 보도되었으나 대다수의 레닌 동상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한다. 러시아 사람들은 잘못된 과거의 역사도 자신들의 역사로 받아들이고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니 과연 대국 사람들다운 폭넓고 여유 있는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에도 BMW와 Coca cola, DHL 그리고 SAMSUNG과 LG가 있었다. 러시아 시내로 들어가면서 눈에 가장 익숙한 것은 역시 광고였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상징인 로고들이었다. 그렇게 자본은 국경을 넘어, 삶의 양식과 감수성까지 통일하면서 그곳 러시아에도 진주(進駐)해 있었다.


  표트르 1세가 유럽의 명망 있는 조경사들을 모조리 초빙하여 파리와 로마, 베니스와 암스테르담을 능가할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하게 만들려고 했다는 도시 쌍페테부르그. 그 아름다운 도시의 자태는 어둠속에 조요히 가라앉아 있었고 우리 일행은 네바강가에 위치한 모스크바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하루종일 계속된 비행으로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잠을 청했으나 잠은 좀처럼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네바강가에서의 첫날 밤은 하얀 밤이 되고 말았다.




2. 독재자의 유적들 사이를 거닐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보니 모기에 물린 자리가 부어 있었다. ‘러시아에도 모기가 사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식을 간단히 마치고 일행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산책을 즐기곤 했으며 고골리의 소설 제목 그대로인 넵스키 대로(Nevskii Prospekt)를 가로질러 안개 자욱한 네바 강가에 도달했다. 라도가 호수(유럽에서는 가장 크다)에서 발원해 핀란드만으로 흐른다는 네바강은 상류인 호수가 넘쳐 몇 년에 한 번씩은 범람한다고 한다. 네바강 이편 안개 너머로 피터폴 요새(Peter-Paul Fortress)3)가 보였으며 강 건너에는 러시아 황제들이 겨울을 지냈다는 겨울궁전(에르미타쥬 박물관)이 바라다 보였다.


  피터폴 요새는 발트해(Baltic Sea)를 거슬러 올라와 러시아로 침입하는 적들(스웨덴과의 북방전쟁 대비)을 대비해 표트르 1세가 1703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요새라고 했다. 외부의 적들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요새는 한번도 외부의 적들과 싸우는 거점으로는 사용되지 못했고, 대신 내부의 적인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사용되어 그 악명을 떨친 아이러닉한 장소이기도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젊은 시절 혁명당원들과의 친분 때문에 이곳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발트해로 흐르는 네바강물은 마치 역사의 흐름처럼 도도해 보였고 피터폴 수용소에서 잠시 러시아의 역사와 수인(囚人)들의 심정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좀처럼 정동(affection)을 느낄 수는 없었다.


  페테부르그에서는 곳곳에 표트르 1세(Pyotr I)의 자취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에 비해 뒤떨어진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발트해 연안에 접해 있고, 유럽에 가까운 페테부르그로 수도를 정한 것도 표트르 1세였다. 그가 도시 자체를 건설하고 수도로 정했던 만큼 도시 곳곳에서 그가 건축한 건물과 그의 체취를 만나는 일은 매우 흔했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며 러시아를 재건하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던 황제. 기형적으로 팔다리가 길고 머리와 발이 작았던 황제. 지나치게 작은 발에 컴플렉스가 있어 늘 덧신을 신고 사람들을 만났다는 그는 최고권력을 휘둘렀음에도 한 인간이었던 모양이다. 사람은 사라졌어도 그가 남긴 유적들은 아직 곳곳에 건재해 있었다. 표트르 1세가 남긴 유적들 사이를 거닐면서 역사에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 비상한 노력과 리더십으로 많은 일을 하곤 사라진다는 비코(Giambattista Vico)의 영웅사관을 떠올렸다.





  표트르 대제는 유럽사회에 비해 낙후된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러시아의 근대화를 추구한 왕이었다. 그에게 러시아의 근대화는 곧 서구화(Westernization)였고, 유럽 따라잡기였다. 아마 그는 우리 역사의 박정희와 유사한 인물이었던 듯 하다.


  서구의 발전된 과학기술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정책으로 일관하던 조선사회는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가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후 2차 대전의 종전 결과로 식민지 사회에서 해방이 되었지만 스스로 독립을 성취하지 못한 탓에 분단과 6.25를 겪고 국민들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4.19 혁명을 이어가기에 장면정부는 너무도 무능했고 결국은 박정희가 5.16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조국근대화의 기치를 들게 된다. 박정희의 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명료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으며 비판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의 공에 대해서 말하는 것 자체로 보수반동이라는 딱지를 발부받아야 한다면 그 또한 편향되고 왜곡된 인민재판식 사고패턴일 것이다.


  영국을 비롯한 서구유럽사회는 산업 및 경제와 과학기술에서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고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측면에서도 오랜 시행착오를 통해 선진사회의 기초를 다져왔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늦게 출발한 독일과 일본은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강력한 리더십을 통해 단기간에 국가발전을 이룩한다는 전략을 택하게 된다. 그것이 독일의 나치즘이고 일본의 천황제다. 새롭게 부각하는 독일과 일본의 파시즘은 서구자본주의사회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고 이 파시즘과의 대결에 자본주의의 미국과 공산주의의 소련은 연합전선을 펼쳤던 것이다. 그 결과 독일과 일본의 파시즘은 패망하고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냉전체제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미국은 소련의 강력한 공산화 정책에 맞서기 위해 독일과 일본을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로 구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결과 이 두 나라(독일은 서독에서지만)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와서 한국, 대만, 싱가포르, 중국 등의 후발국가들은 시대변천에 따른 새로운 모델과 상징을 이용하여 따라잡기에 나섰고 성공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잡기 발전의 사회과학적 이론은 후발사회가 단기간에 국가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강력한 리더십이 이루어져야 하며 사회의 모든 부문이 경제적 생산성을 목표로 총동원되어야 하는 사회적 구조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발전과정 기간 단축을 위해서는 모종의 혁명적이며 극적인 조치, 제도와 틀의 구조조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이른바 자본주의적 발전모델이론에서 말하는 효율적인 리더십과 사회적 에너지의 동원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의 경우에는 군출신 지도자인 박정희의 ‘선의의 권위주의(soft authoritarianism)’4)와 사회의 군대조직화였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이 행복하고 보람 있는 삶의 조건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최소한의 배고픔이 해결된 상태에서 추구할 수 있는 질문이다. 1960년 한국은 1인당 GNP가 67$이었고 외국의 원조로 겨우 유지되는 기아상태였다. 당시 빈곤한 사회상은 우리의 윗세대들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박정희는 경제발전이 이룩된 이후라야 사회발전과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다고 확신했고5) 이를 위해서 국가의 최우선 목표를 경제성장에 두고 그것을 추구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근래에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한 나라의 지도자들은 모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 지도자를 가졌던 나라였다. 대만은 1988년까지 계엄령 체제하에 있었고, 중국의 등소평 또한 매우 강한 카리스마를 행사한 지도자였다. 그렇게 볼 때 우리가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비판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고 좀 더 과학적이고 냉정한 비판을 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감정적으로 혹은 무조건 독재를 비난하는 것이 보다 진보적인 의식의 소유자인 것처럼 막연히 생각하는 것은 근거 없이 유포된 또 다른 이데올로기에 농락당하는 의식일 가능성이 높다.



       


  네바강물에 손을 담근 채 표트르 1세와 박정희를 비교해 보면서 피터폴 요새를 나섰다. 다시 넵스키 대로가 펼쳐졌다. 고골리는 ‘넵스키 대로보다 훌륭한 곳은 없다’고 말했다 하는데 실제로 그의 소설 『외투』에서도 넵스키는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시내는 유럽으로 향하는 창, 도시 자체가 박물관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아름다웠다. 우리 일행은 쿠즈네츠느이 페레울록(Кузнечный пер)있는 도스토예프스키 기념관으로 향했다. 러시아정교의 교회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을 집필했었고,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쓰다가 폐혈관이 터져 죽기까지 살았던 그곳은 도스토예프스키 기념관이 되어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자취를 느낄 수 있도록 모든 것이 매우 잘 보존, 관리되고 있었다. 


  군의관이었던 그는 불어에 능통했으며 25세에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소설을 쓰면서 러시아 문단에 등장했다. 혁명주의자들과 친분이 있었던 그는 체포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고 극적으로 살아나 시베리아 유형길에 오른다. 시베리아의 경험이 『죄와 벌』에 반영되어 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유형을 가고 그곳까지 따라 나선 소냐의 이야기는 그곳 체험에서 연원한 것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도스트옙스키는 외모에 신경 쓰는 댄디스트였고, 자신의 나이보다 30살이나 연하인 두 번째 부인의 옷을 골라주는 섬세한 사내였으며, 세수를 지나칠 정도로 오래하는 결벽증의 소유자였다. 45세에 늦둥이를 본 아버지였으며 신혼여행길에서 룰렛게임에 재산을 잃어 러시아에 돌아오지 못했던 도박을 즐기는 사내였다. 서재에서 잠들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전형적인 올빼미 체질이었고 단 것을 좋아해 아이들이 늘 아버지에게 단 것을 찾곤 했다는 아이들의 아버지였다. 두 번째 아내 안나와는 속기사와 작가로 만나 4개월 만에 청혼을 하는 열혈연애주의자였고 늘 차를 마시되 자신이 직접 끊여 먹어야 하는 까다로운 성미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서양미술에 조예가 깊었음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두번째 부인인 안나와 결혼하여 유럽여행에 나가서 4년간 체류한다. 그는 이 기간에 로랭의 「아시스와 갈라테아」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서 서양의 무릉도원이라고 하는 아르카디아적 아름다움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가 본 이 감동은 『악령』속에서 스타브로긴의 고백으로 나타나고 있다. 같은 그림을 본 니체는 그 그림 앞에서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 그림 속에서 무엇을 발견했던 것일까?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에서는 인간 추악함의 극한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 극한은 도박에 침윤되기도 했던 그가 관찰하고 발견한 인간의 내면풍경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 자명하다. 동시에 독실한 기독교도이기도 했던 그는 그 그림 속에서 간절히 바라던 이상향 혹은 속악한 세계로부터의 간절한 구원을 꿈꾸는 지경(地境)을 발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와서 세계의 3대 미술관 가운데 하나라는 에르미타쥬 박물관6)을 관람하고 나서 카잔 대성당을 둘러 본 후 저녁때 러시아의 그 유명한 발레 <백조의 호수>를 관람했다. 소극장이었고 발레단이 국제적인 발레단이 아니어서 전체적으로 균형감과 통일성이 떨어지는 발레이기도 했지만 러시아 발레의 흥취를 느끼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백조의 호수>는 그 줄거리를 동화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내용 자체가 심오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발레는 내용을 즐기는 서사물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과연 발레리나들의 몸짓만으로 예술이 완성될 수 있을 것인지는 의심스러웠다.


  <백조의 호수>라는 발레극은 너무도 백인중심주의, 남성우월주의에 가득 찬 서사였다. 주인공(독일공국의 왕자 지그프리트와 백조로 변한 왕녀 오데트)이 있고 그에 대립하는 적대자(Antagonist, 마법사 로트바르트와 그의 딸 오딜)가 있다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의상에서부터 흰색 옷은 선하고 고귀한 것이며 흑색은 악마적인 것이라는 기초적인 이분법에 의존한 서사였다. 마법사는 왜 그토록 검은 백조를 왕자의 짝으로 만들려 하는가? 그는 왜 그런 의지를 갖게 되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가능하지 않다. 그런 질문은 모든 사태와 사물에 원인이 있고 어떤 행동을 야기하는 주체의 의지를 상정하는 근대적인 사고방식이다. 신은 원래부터 선한 존재이며 선한 의지는 그의 본성이고 그의 모든 행동은 모두 선한 것이며 악마는 그 반대다. 따라서 마법사는 그가 마법사인 한 악하다. 그가 악한 이유는 그가 마법사이기 때문인 것이다. 마법사란 묻기도 전에 이미 악의 상징이다. 그는 단지 마법사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러나 마법사의 의지, 세상을 온통 검은 색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의 ‘있음’과 ‘작동’은 인간세계와 인간심리의 반영일 뿐이다.


  그들의 몸짓은 하나의 언어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것은 내용층위(스토리)가 아니고 표현층위(담론discourse의 차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즉 말이 없어도 스토리는 전달된다. 이런 경우에 서술자는 누구인가? 그들의 몸짓의 연결고리들은 일정한 계기와 인과관계의 질서를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그것은 관중에게 서사적으로 수용된다. 그렇다면 담론의 층위에서 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추동하는 서사의 부분은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서사의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음악과 무용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에르미타쥬 극장의 <백조의 호수>를 관람하던 중간에 밖으로 잠깐 나와 보니 네바강변에는 분홍빛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밤 9시인데도 북위 60도의 도시답게 해는 아직도 네바강 건너편에 머무르고 있었다.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우리들은 페테부르그의 향취를 가슴에 안고 잠이 들었다. 넵스키 대로를 외투깃을 세운 채 웅크리고 걸어 다녔을 고골리와 아들의 완쾌를 빌며 교회에서 기도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환영이 호텔방의 천장위에 아른거렸다.




3. 바다와 바람




  아침에 일어나 러시아 국립미술관을 관람했다. 일요일인 탓에 거리는 한산했고 미술관 앞 공원에 푸쉬킨 동상 머리 위에 앉아 있는 비둘기들도 한가로워보였다. 러시아 미술관에는 서양 중세의 종교화에서부터 간딘스키까지 전시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한 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반 아이바조프스키(Ivan Ivazovsky)7)라는 화가였다. 19세기 이동파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아이바조프스키는 주로 바다의 풍경을 자신의 소재로 삼았던 화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도 아이바조프스키의 작품을 보고 감탄을 연발했다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아이바조프스키의 <제9의 파도>를 보고는 ‘이 폭풍우를 묘사한 그림에는 환희가 있다. 인생을 흔히 항해에 비유하기도 하거니와 바다실로 덮치려 하는 폭풍우에 보는 사람의 마음을 격렬하게 뒤흔드는 영원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했다 한다. 항해를 하는 이들에게는 8번의 쉬운 파도와 3번의 격동의 파도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 9번째 파도는 가장 무서워서 이 파도만 넘으면 다시 평온을 되찾는다고 한다. 그림에는 그 9번째의 파도를 앞두고 난파된 닻에 매달린 사람들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그의 그림에는 인생에 대한 우의(Allegory)가 담겨 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절박한 투쟁을 하는 인생역정을 느끼도록 해 주는 그의 그림은 노도(怒濤)에 비해 한 없이 나약하면서도 또한 파도에 맞서는 장렬한 인간의 삶이 표현되어 있다. 바람에 시달리고 격랑에 찢긴 돛폭을 나부끼며 본대로 귀환하는 배, 파도는 잘게 출렁거리며 배 주위로는 빛이 비추이고 먼 해원 위로는 흰구름이 꿈결처럼 펼쳐져 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그의 그림엔 환상적인 모험과 격정, 그리고 그 뒤에 찾아 들게 마련인 벅찬 감동과 고단함이 함께 있다. 꿈과 모험 그리고 공포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자가 가지게 마련인 심정들이 복합적으로 들어있는 것이다. 그 피곤함, 고단함은 결코 패배가 아니었다. 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용감히 나아가 싸우는 모습 그것은 낭만이기도 하면서 소설적 주인공의 모습을 닮았다.


  그 외에도 이반 쉭신(Ivan Shishkin)의 그림 또한 아름다웠는데 그는 주로 숲과 나무를 그렸다. 그러나 숲을, 나무를 그렸으되, 숲이 가지고 있는 숲의 정령, 음험한 욕망은 그리지 못한 듯했다. 나무들과 숲의 저편에는 항상 햇빛이 흘러들고 있었다. 그렇게 러시아 국립미술관은 미술사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었다. 역시 현대의 예술은 추상화였다. 재현(representation)보다는 대상의 기하화를 통해 꿈, 환상, 무의식을 표현하고 있었다.


  오후에는 이삭성당의 내부를 둘러보았는데 기독교의 인물들이 성당내부에 가득 장식되어 있었고 모두 금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러시아 정교는 그 성상(聖像,icon)을 지나치게 숭배한 탓에 로마로부터 이단판정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기독교의 교의가 상(像)을 숭배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단판정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것이 금으로 포장되어 있고, 지나치게 화려했다. 자신들의 종교적 믿음의 대상을 숭배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기독교(유태교가 아닌)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았던 사람이었고, 사도 바울 역시 로마와 근동지역을 떠돌며 온갖 고초를 겪었던 인물이었다. 초기 기독교도의 그 헌신성을 생각할 때 황금옷을 입고, 화려한 채색으로 성당에 붙어 있는 그들의 그림은 기독교의 것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숭배되어 현대인인 우리가 보기에는 낯설고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이삭성당을 나와서는 궁전광장과 피터대제 기마상을 구경했다. 그리고 안나 아흐마토바(Anna Andreyevna Akhmatova) 기념관(폰탄카 운하 34번지(Фонтанка р. наб. Д.34)에 들렀다. 안나 아흐마토바는 러시아의 오데사 출신으로 본명은 고렌코(Gorenko)다.. 그녀는 첫 남편인 N.S 구밀료프와 함께 러시아 혁명 전에는 상징주의에 반대하고 시에 현실성과 명석성을 회복하려는 아크메이즘(Akmeizm)8)을 주장한다. 러시아 혁명 후에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수양버들』(1940)을 내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주다노프(Zhdanov)9)로부터 ‘인민과는 무연(無緣)한 데카당 시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후 스탈린 사후의 해빙기에 시작(詩作)활동을 재재했다. 혁명에 대한 위화감으로 끝내 사회주의 노선을 거부하고 개인주의적 고뇌와 신비적 사상을 기초로 한 독자적 이색적 영역을 지켜나간데 그녀의 진가가 있다.


  그녀가 살았던 집에 와서 그녀가 사용했던 방과 가구들, 집기들을 보니 그녀의 작품세계와 더불어 그녀가 가졌을 심리적 고뇌가 훨씬 더 잘 이해되었다. 특히 그녀의 시 가운데 「바람아 나를 묻어다오」와 「내 목소리는」는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바람아


나를 묻어다오!


바람아 나를 묻어다오!


정든 이 아무도 오지 않고


떠도는 저녁과


대지의 고요한 숨결만 찾아든다




너처럼 자유로웠던 나


너무도 살고 싶었다.


바람아, 보아라


아무도 돌볼 이 없는 차디찬 내 육신을




저녁이 만든 어둠의 옷으로


이 검은 상처를 덮어다오


그리고 푸른 안개가 나에게


송가를 읽어주게 해다오




마지막 잠이 들


외로운 내 영혼을 위하여


키다리 사초처럼 울어다오


봄을 위하여, 나의 봄을 위하여


       -「바람아 나를 묻어다오」전문-




  ‘아무도 돌 볼 이 없는 차디찬 내 육신’이라는 대목에서 안나가 느꼈을 고독은 상상이 가능하다. 이러한 고독은 러시아 혁명 후 그녀의 작품을 부르주아적이라고 치부했던 공산주의 문학관 때문에 연원한 것이기도 했겠지만 보다 본원적으로 인간 실존의 고독에서 연유하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그녀는 ‘봄’을 노래하고 있으며 ‘봄’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에게 있어 그녀만의 ‘봄’이 도래했을지는 우리로서는 잘 알 수 없지만, 그녀를 위한 기념관이 세워지고 우리들이 그녀를 방문하는 것이 그녀가 말한 봄이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문학이 이해되는 흐름으로 바뀌었다는 것만큼은, 그녀의 봄이 이해되고 있다는 점만은 자명했다.  


  이렇게 러시아의 문인, 화가들을 통해 러시아의 예술적 향취를 맛보는 것 외에 이곳저곳을 오가며 러시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별로 유쾌하지 못했다. 그(녀)들은 싸늘한 눈초리를 가졌다. 한마디로 인상이 별로 좋지 않은 셈이었다. 그것이 한국인으로서의 내가 행하는 자문화중심주의적인 판단인지도 몰랐지만 눈빛 말고도 실제로도 불친절했다. 조롱하는 듯한 미소, 몸이 부딪혔을 때 미안하다고(I`m sorry) 말하기는커녕 오히려 쏘아보았다. 불친절하고 매너가 없었다. 매너란 무엇인가? 그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고 동시에 교육과 여유에서 연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마음의 여유도, 친절함을 베푸는데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인 셈이었다. 내 가방이 넘어졌을 때 보내오던 화난 눈빛, 자칫하면 주먹을 휘두를 태세였다. 나는 아마도 러시아를 생각할 때 오래도록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예술의 향취와 러시안들의 차거운 눈빛이 오버랩 되면서 우리는 쌍페테부르크를 뒤로 하고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좌석을 지시하는 넘버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좌석번호 20번은 정확히 20번과 21번 사이에 붙여져 있어서 승객들의 혼동을 야기시켰다. 모스크바의 Baggage Claim에서는 가방이 혼란스레 쏟아져 나왔고 이곳저곳에서 나오다가 결국엔 아예 멈추어 버렸고 승객들을 한없이 지루하게, 우왕좌왕하게 했다.




4. 모스크바 강을 따라 붉은 광장으로




  9월 5일(월) 아침에 일어나니 모스크바의 아침은 자못 쌀쌀했다. 한국의 가을 날씨처럼 하늘은 높고 대기는 매우 찼다. 햇볕은 아직 따가웠는데도 공기는 차서 벌써 북방의 겨울이 준동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케 했다. 크레믈린 궁 입구에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크레믈린 궁전을 구경하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한때는 백악관과 더불어 세계를 좌지우지 했던 곳. 그러나 크레믈린 궁 안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위압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러시아 정교 스타일의 건물 속에서는 알 수 없는 음모가 진행 중인 것처럼 느껴졌고, 관광객들은 보도블럭 위에서 내려서서는 안 되었고 2인 이상의 관광객에게는 반드시 수행원이 대동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에게도 한 사람의 여성안내원이 따라붙었다. 크레믈린 궁 안에 여러 성당을 구경할 때도 말없이 그러나 매서운 눈초리로 우리 일행을 따라 다녔다. 그녀는 안내원이 아니었고 우리를 감시하는 감시원이었다. 우리에게 따라 붙었던 감시원의 가방 안에는 총이 들어 있었다. 나의 몸이 그녀의 가방에 부딪히자 그녀를 흠칫 놀라며 나를 경계했다. 그녀가 가방에 늘 손을 얹고 우리를 따라 다녔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러시아 대통령이 업무를 보는 공간이니 만큼 보안유지가 필요하다는 것과 테러의 위협이 증가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전시실 곳곳에 앉아 관람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자들은 매우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표를 받아 마킹을 하고는 표를 손등으로 툭 치면서 내미는 행동에서 공산주의 사회 특유의 권위주의를 느낄 수 있었다.







  문득 로빈 윌리엄이 주연했던 <허드슨 강위의 모스크바>란 영화가 떠올랐다. 모스크바 서커스단원인 블라디미르와 아나톨리는 뉴욕에서 공연을 하면서 미국사회의 자유와 풍요에 매료되어 망명을 결심한다. 아나톨리가 먼저 망명을 제의하지만 결국 실천에 옮긴 것은 블라디미르였는데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망명한 블라디미르를 버스 안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의 아나톨리의 그 눈빛이 떠올랐다. 자유를 찾는 것에는 그처럼 도전과 위험이 따르는 법이기는 했지만 생각만하고 실천에 옮기지 못한 그 아나톨리들은 과연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는지...   


  그렇게 크레믈린 궁을 빠져나와 모스크바 대학으로 향했다. 모스크바 대학은 역사가 오래되고 유서깊은 곳이라 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건물은 스탈린 시대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스탈린 양식은 좌우 대칭이 정확히 일치하면서도 건물이 크고 위압적인 것이 특징이다. 모스크바 대학의 건물은 스탈린 양식(고딕형식의 변형)으로서 모스크바 정도(定都)8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지어진 것으로 모스크바 시내 곳곳(모스크바 대학, 외무성 건물, 우크라이나 호텔 등 모두 7개)에 있다고 한다. 스탈린은 모두 8개를 계획했으나 7개를 짓고 결국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