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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2
‘한톨 감’에 새긴 한국 천년의 시 정신-탄생 100주년 정완영 시인의 ‘감’, 이부재 화백이 쓰고 이한성 시인이 새겼다.

 

김천에 직지사 근처에 위치한 백수 문학관 앞에 서자 직지사 숲속으로 학 한 마리가 날아간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고, 백수 정완영 시인이 다녀가는 것만 같다. 1919년 11월 11일 출생하여 2016년 8월 27일 타계하신 백수 정완영 시인, 고인은 현대시조의 선구자로 시조의 중흥기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시조계의 거봉으로 오염되지 않은 물이 되어 세상을 정화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그런 백수 정완영 시인의 시 정신을 담아 우담 이부재 화백이 쓴 글을 이한성 시인이 새겼다.

초가집 까만 지붕 위 까마귀 서리를 날리고

한 톨 감 외로이 타는 한국 천년의 시장끼여

세월도 팔짱을 끼고 정으로나 가는 거다

- 정완영, ‘감’ 셋째 수 -

외로이 매달려 있는 늦가을 한 톨 감에서, 한국 천년의 시장끼를 담아냈던 큰 시인. 그런 정완영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 시인은 1960년대 초 국제신보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한 이래, 민족 문학의 정수인 시조 창작에 있어 높고 새로운 예술적 경지를 개척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조시인이다. 그의 시조는 전통적인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관조의 미학을 탐구하면서, 시조를 통한 민족 문학의 현대적 계승과 민중적 생명력의 탐구, 생명 사랑과 인간애를 추구하였다. 

정완영 시인은 “말로만 쓰는 것이 시가 아닙니다. 말과 말의 행간에 침묵을 더 많이 심어두는 것이 시조입니다. 정형시 시조는 불과 45자 안팎이지만 그 행간에 숨어있는 수는 무궁무진하고 변화무쌍합니다”라고 한다. 이러한 수를 함축해 내기 위해서는 온갖 탐욕과 망상을 벗어버리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시를 쓰던 날들, 나름으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마다 등불 하나씩 달아준다는 심정으로 향 사루고 정죄하고 지성을 다했다는 시인, 그런 시인은 1천여 편의 시조를 우리 곁에 두고 저승으로 떠났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짓지 않는 불자이자 시인이기에, 어쩌면 지금도 하늘 저편에서 우리 가락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리라. 시인은 스물세 살 무렵부터 60여 년을 하루 10시간 이상 시조를 창작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시조는 내 조국이요, 내 조국은 곧 시조”라고 하며 창작했던 시인의 작품을 이부재 화백이 정성스레 써 내려 갔고, 이한성 시인이 마치 ‘피’로 새기듯 한 글자, 한 글자, 새겨놓은 것이다.

정완영 시인은 세계화, 국제화 시대의 핵심 화두는 자기 정체성으로, 그 민족만의 예술과 문화가 아니고선 세계를 감동시킬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진정한 우리 문학을 세계 속에 내놓아야 그들의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우선 시조단이 분열하지 말아야 해요. 모두가 자기가 핵심적이라고 생각하니 문제지요. 다들 성주 노릇을 하려 하고, 작은 왕국만 만들려 하니 앞이 보이질 않는 겁니다.” 60년 동안 시조를 썼지만 좀 더 고풍 하면서도 위의가 있게 쓰고 싶다는 시인. 세상 떠나는 그날까지 시조의 앞날을 걱정하며 시조로 하나 되는 날을 기다렸던 시인. 정완영 시인은 시조의 3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시조를 유(流), 곡(曲), 절(節), 해(解)로 봐요, 태백산에 비가 내려 흘리고 유(流), 그다음엔 가다 보면 낭떠리지 폭포를 만나요. 힘을 주게 되는 마디(節)지요. 폭포에 물이 떨어지고 나면 그냥 바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에요. 한 바퀴 돌아요. 소(沼)를 만들어 자정작용을 한 뒤 풀어서(解) 흘러가요. 한 번 흘리고 한 번 감아 돌고 한번 마디 짓고 그다음에 풀어내는 것, 시조 한 수를 나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집에서 쓴 시조를 가지도 다니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꺼내 고치곤 했다는 정완영 시인. 시인은 참사람이 되어야 하고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시는 부드러움, 여유, 타이름이라는 근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인과 시 정신이 사라지면 세상은 복잡한 아수라의 세계가 될 수밖에 없기에, 시를 많이 읽고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행복하고 건전한 사회임을 강조한다. 그런 시인이기에 이 세상 떠나는 그 날까지 우리의 가락 짓기를 단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하나의 미열을 앓는 것입니다. 자고 나면 근심이 생기고, 가보고 싶은 곳도 있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생기고, 이렇게 미열을 앓는 것이 인생이라면, ‘예술은 그 통증입니다,’ 몸부림치는 것이지요. 그 통증에 눌려 죽으면 그뿐이지만, 이 통증을 이기고 나면 그다음엔 뭐가 오겠어요. 아기를 낳은 산모처럼 기운이 쭉 빠진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살아 있다는 환희이지요. 그 환희는 어디로 접목이 되냐 하면 허허벌판 같은 데 닿지요. 서양 말로는 그것을 고독이라 할지 모르지만 나는 허적이라 불러요. 고독과 허망과 눈물과 분노도 되고, 탄식과 회한도 되고, 그것이 한 덩어리가 되는 빈 들판 같은 적막 하나 얻으려고 우리는 이 세상에 왔습니다. 인생의 보수는 그것밖에 없습니다. 예술가의 보수는 특히 그렇습니다. 그걸 얻으려고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정완영 시인은 모든 독자의 가슴에 따스한 감동을 전해주고 세상을 떠났다. 이런 가슴을 적시는 감동 어린 작품들을 글로 쓰고 가슴에 새기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시 정신을 본받는다는 점에서 본 한국시조문학관에 있는 이부재 화백이 쓰고 이한성 시인이 목판에 새긴 이 글은 매우 의미있는 유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년 이래 평생 가난한 생활을 했지만, 마음의 한없는 슬픔과 정한의 실타래를 풀어내며 고향을 노래했던 시인은 이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게 되었다. 시인의 이러한 오롯한 시정신을 기리기 위해 올 여름도 김천 백수문화제를 준비하는 손길과 발길을 바쁘기만하다.

작품만을 좋아했을 뿐, 단 한번 뵌 적 없는 고, 정완영 시인이 먼 길을 나서던 새벽, 나는 다음 작품을 창작했다. 그리고는 오래도록 텅 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가을 별 마중하러 당신이 가십니다

곡기 다 놓으신 길 시구(詩句)만은 꼭 쥐고

분이네 살구나무를 돌아 돌아, 가십니다

어머니 환한 목소리 쌍무지개로 오릅니다

못 다 읊은 가락들은 배롱나무꽃으로 붉어

투욱 툭, 쇠북을 치며 새벽까지 웁니다

- 「가을 마중-백수 생각」전문